혼인 잔치에 오십시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 19,9)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14
마리아 사제·평신도 운동의 이 소책자는 거룩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소개합니다. 곧 임금의 혼인 잔치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삼중의 거룩한 교회의 신비, 수많은 성인의 신부다운 삶, 그리고 우리 삶의 태양이자 혼인 잔치인 거룩한 미사를 다루며, 우리 시대 교회가 받은 은총과 박해에 대한 증언도 담고 있습니다.
추천사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원한 복락에 이르는 길을 오직 하나만 마련하셨습니다. 그 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나는 길이다. (요한 14,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생명을 사랑으로 내어 주심으로써, 곧 가장 높은 사랑의 표현이자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로서(참조: 요한 17,1-5), 또 인류의 구원을 위한 가장 향기로운 속죄 제물로서(참조: 에페 5,2) 우리에게 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제단 위에서 바치신 사랑의 제물을,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당신 교회에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십자가 제사의 현재화를 당신의 혼인 잔치와 떼어 놓을 수 없게 결합하셨습니다. 이 혼인 잔치는 당신의 살과 피를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믿고 사랑하는 모든 영혼에게 내어 주심으로 거행됩니다. 창조와 인류 역사 전체에서 가장 큰 사랑의 행위는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적 자기 봉헌입니다. 이 봉헌은 이 땅에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체성사 안에서 거행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 19,9)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의 가장 깊은 뜻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 자신의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창조하셨고, 이 생명은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높은 행복과 기쁨을 뜻하며, 혼인 잔치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자신의 본질을 복되게 바라봄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피조물이 창조주와 가장 깊이 하나 되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 4,8)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하면서만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행복은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계명, 곧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높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조: 신명 6,4-5; 마르 12,30)
이 사랑의 행위는 너무도 위대하여, 묵시록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모습으로 선포하듯이, 영원히 기억으로, 그리고 하늘의 전례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도 영원히 대사제로 계십니다. (참조: 히브 7,24)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대사제는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길을 진리와 떼어 놓을 수 없게 맺어 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조: 요한 14,6) 그분은 진리를 증언(그리스어 「martyrein」)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참조: 요한 18,37), 증인(그리스어 「martys」), 충실하신 분(「fidelis」), 참되신 분(「verus」) 그 자체이십니다. (참조: 묵시 3,14) 이로부터 우리는 영원한 행복, 곧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이르는 길이 진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충실함, 순교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붙드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믿음, 곧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에 충실히 매달리는 일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며(참조: 히브 11,6), 다시 말해 하늘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와 하늘에 이르는 길을 감상적이고 개인의 취향대로 짜인 산책으로, 또는 풍성한 알라카르트 메뉴처럼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복음에 낯선 것은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교에는 십자가도, 희생도, 하느님의 분명한 뜻에 대한 순종도, 자기 부정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그리스도교에는 참된 초자연적 사랑이 없고, 그러므로 참된 기쁨도, 참된 어린양의 혼인 잔치도 없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본질상 죄 없이 바쳐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는 환상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의 그리스도교일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자신과 참된 그리스도교에 가장 정반대되는 것, 곧 가장 추한 희화일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처럼 십자가도 진리도, 따라서 사랑도 없는 환상적이고 희화화된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과, 그 뒤 모든 세대의 참된 가톨릭 신자들은 사도 유다(타대오)의 다음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 왔습니다.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해진 믿음을 위하여 싸우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하였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의 불경한 욕망을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저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현세적 인간이며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유다 3,17-23)
길고 힘들고 위험한 영원한 행복의 길에서 가장 크고 가장 효과적인 도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미사 제사의 선물로, 당신 십자가 제사의 참된 현존으로, 그리고 당신 몸과 피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큰 보물이며, 참된 영적 태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영원한 생명 안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거룩한 미사 제사와 거룩한 영성체는 또한 영혼이 하느님을 향한 참된 영원한 사랑 안에서, 그분을 향한 신부다운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삶의 거룩함을 뜻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십자가 제사를, 오직 사제만이 성사로 거행할 수 있도록 원하셨습니다. 사제가 없으면 미사 제사도 없고 영성체도 없으며, 그러면 교회의 삶에서 참된 영적 태양이 꺼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룩한 사제가 필요합니다. 정결하고 진실하며 자비로운 영원한 대사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토록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당신 사제들 안에서 다시 우리의 거리를 걸으시며, 헤매고 의심하는 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죄의 용서를 베푸시고, 무엇보다도 미사 제사를 바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간 도구인 사제들도 정결하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겸손하고, 늘 진리를 위하여 증언해야 합니다.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그중에서도 첫째로 사제들이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진리와 교회의 삶에서 거룩한 성체성사가 지니는 중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 곧 진리와 하느님의 위엄에 대한 점점 더 깊은 믿음의 깨달음으로 거룩한 미사 제사를 그에 걸맞게 거룩하게 거행하고, 깨끗하고 믿음 깊고 겸손한 마음으로 영성체를 열매 맺도록 공경하며 모시는 것. 바로 여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본래 의미와 목적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대다수 공의회 교부들의 의도에 따르면 그러합니다.
성체의 신비에서 나오는, 교회와 모든 성인의 변함없는 감각에 따른 참된 쇄신만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 성인들을 낳을 것입니다. 거룩한 어린이들, 거룩한 청소년들, 거룩한 가정들, 하느님께 봉헌된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들, 거룩한 수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룩한 사제들. 그때에야 교회에 참된 영적 봄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봄을 굳게 바랍니다. 그 봄은 이미 우리 시대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부로서 깊이 사랑하고, 성체의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은 영혼들에게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 「혼인 잔치에 오십시오!」는 교회가 그토록 바라 온 참된 성체 쇄신에 구체적인 영적 도움이 될 것이며, 많은 영혼에게 빛과 위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거룩함을 향한 격려를 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작고 귀한 책이 널리 퍼져 많은 영적 열매를 맺게 되기를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사람이 되신 구세주의 첫 감실이신 사랑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과 함께, 우리 안에 신앙과 성체이신 우리 주님을 향한 초자연적 사랑을 키워 줄 다음의 오래되고 잘 알려진 영성체 노래의 말을 우리가 자주 되뇌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오,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는지요!
내 영혼의 가장 좋은 벗이시여, 언제쯤 당신과 하나가 될까요!
천 번이나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 없는 삶은 고통입니다.
천 번이나 당신께 탄식합니다. 오 주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세상에는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할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 오직 당신의 사랑만이 내 온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저는 깨끗하지 못하여 당신을 제 안에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당신 입에서 나온 한마디 말씀이면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간절히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예수님,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내 온 마음을 당신께 드리오니, 영원히 소유하소서. 아멘.
이 책을 쓰고 펴내고 읽는 모든 분께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2019년 6월 29일,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에
+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아스타나(누르술탄) 성모 마리아 대교구 보좌 주교
어린양의 경배 (겐트 제단화, 얀 반 에이크)
삼중의 거룩한 교회의 신비
삼중의 거룩한 교회는 투쟁 교회, 정화 교회, 승리 교회로 이루어집니다. 땅 위의 그리스도인들은 투쟁 교회이고, 연옥의 영혼들은 정화 교회이며, 하늘의 복된 이들은 승리 교회입니다. 이 셋은 그리스도와 맺은 긴밀한 일치를 통하여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룹니다. 신경에서 우리는 이 공동체를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부릅니다. 모두가 성화은총을 통하여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
땅 위의 성인들의 통공은 우리에게 교회의 모든 은총의 보고에 참여하게 합니다. 하늘의 성인들과의 일치는 우리에게 그들의 공로에 참여하게 하고,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게 합니다. 연옥과의 교류는 우리에게도, 그토록 몹시 고통받는 연령들에게도 큰 도움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봉헌하는 거룩한 미사, 대사, 기도와 선행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고, 그들은 다시 큰 감사로 보답하여 우리의 모든 청원을 위해 하늘을 간절히 두드립니다.2
1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신랑이시라는 것은 예언자들이 미리 마련하였고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당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르 2,19) 동시에 사도 바오로가 강조하듯,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골로 1,18; 에페 5,25) 같은 방식으로 사도는 교회와,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모든 신자를 주 그리스도께 「약혼시킨」 신부로 묘사하는데, 그들이 그분과 한 영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참조: 1코린 6,15-17; 2코린 11,2)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796항)
2 연령들은 지상의 곤경과 인간 삶의 깊은 사정을 가장 깊이 아는 이들에 속합니다. 우리에게 아직 열리지 않은 하느님 체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가득 차 있으며, 기도와 봉헌으로 하느님을 뵈옵는 길을 앞당겨 주는 사람들에게 특히 가장 충실한 벗이 됩니다. (성 요한 피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
고운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3 묵시 19,7-9
3 우리는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가 아니면 달리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 우리에게는 다른 길도 다른 문도 없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마리아, 교회의 어머니⁴
혼인을 향한 그리움
성경 전체는 하느님의 그리움 가득한 사랑의 맥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랑은 흔히 그토록 굳고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며, 자비로 그들을 당신께 이끌려 합니다. 이 신랑다운 사랑은 혼인의 이미지 안에서 특히 강렬하게 드러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그것을 준비하셨고, 메시아이자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놀라운 사랑의 교환 속에서 엄숙히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호세 2,21-22
혼인은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온 창조의 가장 깊은 신비이며, 따라서 교회의 가장 깊은 신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순례 길 위에서 혼인 잔치를 향한 그리움으로 자기 신랑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의 어머니 교회를 안팎으로 위협하고 깊이 상처 입히는 무거운 시련에 가슴 아파하며, 이 작은 소책자로 많은 사람의 마음에 하늘 혼인 잔치를 향한 그리움의 불씨를 던지려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신비체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새로 불태우고, 타는 등불을 들고 신랑과 신부를 맞으러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조: 마태 25,1-13)
이 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성인이 이미 완성에 이르렀고, 지금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늘의 영원한 기쁨의 이 큰 잔칫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의 분위기 속으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그 은총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빠진 이 영혼들의 눈에서 말 그대로 빛납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신부다운 신비에 의해 온전히 변화되었고, 세속적인 세상이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행복에 잠겨 있습니다.
다음 장들에서는 교회의 이 빛나는 불기둥들 가운데 몇몇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는 길에 동행해 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이리 오너라.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묵시 21,9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님, 저희는 시간 안에서도 영원 안에서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을 통하여,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이제와 영원히 저희는 온전히 예수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4 마리아는 교회와 지극히 거룩한 성체의 어머니이자 수호자이시며, 천사들의 모후이십니다. 일곱 대천사에 둘러싸여, 마리아께서는 교회라는 배 안에서 모든 신자와 함께 악한 원수로부터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싸움에 서 계십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하늘의 성인들은 충실한 교회 신자들과 함께,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승리를 준비하는 마리아의 나라를 이룹니다. (로스비타 비터리히의 유화)
산 다미아노에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와 상처 입은 신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82 – 1226)가 어느 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도하러 산 다미아노 작은 성당에 들어갔을 때, 그는 예사롭지 않은 영적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그림이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림 속에서 그분의 입술이 움직였습니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다시 세워라. 보다시피 이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가고 있다! […] 그 사랑하는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 시각부터, 그의 거룩한 영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함께 고통받는 마음에 꿰뚫렸습니다. […] 그 시각부터 그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 그는 흐느낌으로 길을 가득 채웠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할 때마다 어떤 위로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2 C 10-11)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가 받은 사명, 보라, 내 집이 허물어지고 있다. 가서 다시 세워라!는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이며, 성 프란치스코의 온 신비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신비를 그는 산 다미아노에서 아직 닫힌 채, 귀한 꽃의 꽃봉오리처럼 받습니다. 포르치운쿨라 작은 성당에서 그 꽃이 그에게 피어납니다.
아시시의 포르치운쿨라 작은 성당
프란치스코와 가난
1209년 포르치운쿨라5 작은 성당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완전한 가난 속에서 복음 선포를 위해 보내시는 복음이 낭독되었습니다. (참조: 마태 10,5-16) 그러자 성 프란치스코는 곧바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하며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이것이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을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하기를 바란다. (1 C 22)
산 다미아노에서 그의 삶의 바탕까지 스며들었던 사명이 여기 포르치운쿨라에서 가장 밝은 빛 속에 그에게 드러납니다. 그는 돌로 된 집만 지어서는 안 됩니다. 살아 있는 예수님의 교회를, 사도들이 세운 그 순수함과 힘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도 사도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가 늘 마음 깊은 곳에서 찾던 것이 이제 약속된 신부의 모습을 얻습니다. 그는 신부를 찾았고, 그 신부는 여러분이 일찍이 본 어떤 이보다 더 고귀하고, 더 부유하며, 더 아름답습니다. (3 Gef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가장 큰 것, 가장 거룩한 것을 맡기십니다. 곧 당신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집, 도시, 예루살렘, 시온, 교회, 이 모두가 신부의 이름입니다. (참조: 묵시 21,2)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사랑하셨듯이 그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녀의 죄와 상처 안에서도 말입니다. 보라, 그녀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 말씀이 성 프란치스코의 온 영혼을 흔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안에서 신랑으로서의 당신 삶을 살아 내시고, 그를 온전히 당신과 함께 십자가로 데려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상처로 그를 상처 입히십니다. 그는 신부, 곧 잃어버린 온 창조가 어떤 나병에 걸렸는지를 「보아야」 하고, 그녀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어떤 상처를 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신랑이 그녀의 가난 속으로 얼마나 큰 사랑으로 내려가 그녀의 나병에 입 맞추고 그녀를 본래의 고귀함으로 되돌려 주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는 가난을 신부다움의 신비로 발견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품으로 교회를 다시 이끌려면, 그는 신랑 자신만큼 가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 포르치운쿨라 작은 성당에 프란치스코 가난의 근원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신부와 약혼합니다.
5 「포르치운쿨라」라는 이름은 「작은 조각」, 「작은 몫」을 뜻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한 순례자가 성지에서 흙을 가져와, 그 흙이 닿는 만큼 아시시 앞 숲의 한 공터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는 그 공터를 마리아께 봉헌하고 그 위에 작은 성당을 지었습니다. 민중 사이에는 천사들이 그곳에서 성모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이 종종 그 노래를 들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성인은 이 장소를 다른 모든 곳보다 더 사랑하였고, 형제들에게 특별한 경외심으로 이곳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 복된 아버지는, 복된 동정녀께서 세상에 당신을 기리어 지어진 다른 모든 성당 가운데 이 성당을 특별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계시해 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인도 다른 어떤 곳보다 이곳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2 C 18-19)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당들 안에서 제게 이러한 믿음을 주셨기에, 단순하게 이렇게 기도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는 여기서와 온 세상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께서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으므로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성 프란치스코)
오, 놀라운 높으심과 놀라운 낮추심이여! 오, 높으신 겸손이여! 오, 겸손하신 높으심이여, 만유의 주님,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빵의 소박한 모습 안에 당신을 숨기실 만큼 당신 자신을 낮추시다니!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으로 청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에 모든 경외와 모든 영광을 드리십시오.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와 마리아에게서 포르치운쿨라 대사를 받다 (코르넬리스 스휘트)
프란치스코와 정결
포르치운쿨라의 신부 신비는 포르치운쿨라 대사 안에서 더 깊이 드러납니다.
어느 겨울밤 프란치스코는 정결에 대한 가장 격렬한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유혹이 너무도 강하여 프란치스코는 추운 밤으로 뛰쳐나가, 옷을 벗고 장미 덤불의 가시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그는 유혹을 이겨 냈습니다. 이 충실함의 승리 위에 두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작은 창문으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포르치운쿨라 작은 성당으로 함께 가자고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들어서자 제단 위에서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천사들의 합창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소원 하나를 말하면 그것을 마리아께 맡길 수 있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는 간청하였습니다. 신앙으로 포르치운쿨라 작은 성당에 들어서는 누구나 모든 죄와 죄벌의 사면을 받게 해 달라고. 마리아께서는 이 청원을 받아들이시고, 신부다운 마음으로 그것을 예수님께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들어주시면서, 프란치스코에게 이 대사를 땅 위의 당신 대리자인 교황에게서 확인받으라고 이르셨습니다. 당시 페루자에 머물던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이 대사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격렬한 유혹과, 장미 덤불의 가시 속에서 얻은 정결 투쟁의 승리에는 어떤 영적 배경이 있을까요? 그 덤불은 이 싸움 뒤에 모든 가시를 잃고, 한겨울 한가운데 꽃으로 가득 찼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죄에서 벗어나 신부다운 꽃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광스러워야 하며,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거룩하고 흠 없어야 합니다. (에페 5,27) 그가 가장 격렬한 유혹 속에서도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지 못하고, 맡겨진 신부를 욕망의 가장 작은 그림자로라도 상처 입힌다면, 어떻게 이 사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낙원에서 뱀과 아이를 낳는 여인 사이의 태초의 적대 관계를 드러내셨습니다. (참조: 창세 3,15) 이 태초의 적대 안에서, 하느님과 창조 세계의 혼인을 미워하고 파괴하려는 악마는 모든 이들 가운데서 선택된 신부의 인도자 프란치스코를 향해 날뜁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육신 안에서 악마와 치르고 이기는 세계사적 싸움입니다. 그는 처녀를 어떤 위험에서 구해 내야 하는지 아는 용의 살해자입니다. (참조: 묵시 12,1 이하) 그의 글들 곳곳에서 마치 그의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처럼 이런 말이 울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몸을 그 악습과 죄와 함께 미워하기로 하자. 육신의 삶으로 그가 우리에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빼앗고, 자기 자신과 모든 이를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Erm 22)
예루살렘을 두고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성 프란치스코의 상처 입은 눈에서 피가 되어 흐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여기 포르치운쿨라 작은 성당에서 사람들은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모든 세기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끈다면, 그것은 그의 참회와 눈물의 열매입니다.6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절정에서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혼인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는 대사제가 십자가라는 혼인 옥좌에서 보내는 전령입니다. 대사제는 그를 보내어 모든 것을 왕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온 창조 세계가 본향으로 인도되어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혼인하게 하십니다. (참조: 에페 1,10; 골로 1,16-20) 교회는 모든 거룩한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의 이 혼인 축제를 거행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숨을 거두시며 고개를 마리아와 요한, 곧 신부다운 교회에게 기울이시고, 당신의 영을 그녀에게 넘기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심장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사랑하시는 신부인 교회에게 당신의 생명과 당신 구속의 모든 공로를 주셨고, 교회가 세례와 성체성사를 통하여 모든 살아 있는 이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6 오늘날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완전한 정결의 삶을 불가능하다고 여길수록, 사제들과 그들과 함께 온 교회는 그것을 구하는 이들에게 결코 거절되지 않는 항구함과 충실함의 은총을 더욱 겸손하고 끈질기게 청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이고 자연적인 도움을 모두 사용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16항)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심장의 상처에서 하늘의 예루살렘, 곧 성사와 사제 직분 질서를 지닌 교회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 그는 모든 꽃, 모든 돌, 모든 벌레, 하늘의 모든 구름, 모든 별이 예수님의 피로 빚어진 신부의 장신구임을 보았습니다. 모든 작은 꽃은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신부에게 주고자 하시는 사랑으로 짜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신부에게 육신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심 안에 그리스도교 혼인의 바탕이 있습니다. (참조: 에페 5,22-32) 그러므로 혼인은 성사입니다. 혼배 예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그들의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존재 안에서 성령에 의해 사제적으로 축성되어, 그들의 부부 사랑이 그리스도 사랑의 거룩하게 하는 힘을 받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공개 알현에서 자주 「몸의 신부다운 신비」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전합니다. 죄 안에서든 거룩함 안에서든. 그러므로 성사의 거룩함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성적 결합은 음행입니다. 둘은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를 자신들의 죄로 채우고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며, 세례에서 시작된 하늘의 혼인을 욕되게 합니다. (참조: 1코린 6,15-20)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봉헌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참조: 로마 12,1) 그래야 우리도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이것은 당신을 위한 내 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꿈에서 교회를 떠받치는 수도자를 보다.
프란치스코와 순종
프란치스코는 교회, 특히 로마 교회에 대한 그토록 깊은 공경과 전적인 순종을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사제의 권위와 개인의 거룩함 사이의 긴장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유언에 이렇게 씁니다. 그 뒤 주님께서는 거룩한 로마 교회의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사제들에 대하여 저에게 큰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를 박해한다 해도, 그들이 받은 서품 때문에 저는 그들에게 피신처를 구하고자 합니다. […] 그리고 저는 그들 안에서 죄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고, 그들이 저의 주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관하여 육신으로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지극히 거룩한 피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그것을 그들 자신이 받아 모시고 그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Test. 6)
교회의 쇄신은 상당 부분 사제와 봉헌 생활자의 성화에서 시작되므로,7 예수님께서는 이 뜻을 위해 기도하고 봉헌하도록 우리를 계속 초대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신비가이며, 사제직의 쇄신을 위하여 속죄의 삶을 살았던 마리아 지일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제들을 나에게 참여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또 하나의 구속자와 구원자를 만들고 싶다. 고통받고 짓눌린 인류를 다시 나에게로 이끌기 위해서다. 나는 그들의 생명이 되고 싶고,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으며, 나 자신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1937년 8월 19일)8
7 사제들의 거룩함은 그들의 특별한 직무가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자격 없는 일꾼들을 통해서도 구원 사업을 이룰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보통 성령의 충동과 인도에 더 열려 있던 이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의 기적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하고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12항)
8 Josef Fiedler S.J., Erneuerung der Kirche – Maria Sieler, Imprimatur: Vindobonae, 1988년 4월 18일, Praep. Prov. Austria P. Josef Czerwinski S.J.
선한 목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목자는,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한 본당 공동체에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이며, 하느님 자비의 가장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르스의 성 본당 신부
모든 사제와 주교, 그리고 종합하여 교황에게서 프란치스코는 신랑의 사제적 현존과 권위를 봅니다. 여기에 교계적 교회의 신비, 곧 가르치는 직무와 목자의 직무, 사제 직무 안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은총의 보고를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마리아의 품에 놓였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품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얻으신 모든 은총을 받으셨습니다.
성령 강림 때 이 은총의 보고는 교회의 품에 심겼고, 그리하여 교회는 마리아와 하나로 결합되었습니다. 이 보고의 열쇠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도 유효하게 열고 닫을 수 있고, 매고 풀 수 있으며, 이것은 특히 거룩한 성사를 베푸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머니 교회는 대사를 통해서도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은총을 베풀고,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들이 마땅히 보속해야 했을 것을 면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강생하시어 마리아께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셨듯이, 이제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는 일에서도 교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
백합을 든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프레스코, 조토)
그리스도의 신부 클라라 (1193 – 1253)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에서 직접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혀 주었습니다. 클라라는 마흔 해 동안, 산 다미아노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신 그 십자가 아래의 여인이 됩니다.
… 이 엄격한 봉쇄 안에서 그녀는 마흔두 해 동안 규율의 채찍으로 자기 몸이라는 설화석고 그릇을 깨뜨렸고, 그리하여 교회의 집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LebKl 10)
이렇게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에서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당신의 집을 다시 세우라는 사명의 살아 있는 해석이 됩니다. 클라라 안에서 교회가 눈에 보이게 되며, 프란치스코는 그 교회를 거룩하고 깨끗한 신부로서 그리스도께 혼인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 프란치스코가 클라라를 사랑함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사랑하심입니다.9
9 참조: Eugen Mederlet OFM, Die Hochzeit des Lammes, 1983, 96-133쪽, Imprimatur: P. Karl Feusi OFM, Provinzial. 프란치스코의 출전 문헌은 Franziskus-Quellen (2009)와 Klara-Quellen (2013)에서 가져왔다.
거룩한 교회를 위한 기도
성 프란치스코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가장 큰 자비 안에서 힘 있는 전구자이신 당신께, 저희의 큰 고난 속에서 도움을 청하나이다. 하느님의 놀라운 피조물인 세상, 온 인류, 그리고 거룩한 교회가 가장 심한 환난에 처해 있나이다.
성 프란치스코님, 가톨릭교회의 굳건한 기둥이신 당신께서는 이미 한 번 흔들리는 교회의 성벽을 떠받치셨으나, 이제 교회가 다시 사방에서 위협받고 있나이다. 저희를 위하여 신앙의 일치를 간구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 밖에 서 있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품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소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곧 교황직이라는 반석 위에 뿌리내린 교도권에 대한 충실로,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공로와 그분의 모든 은총의 보화에 참여하는 데로 이끄는 길을 알아보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님, 예수님 수난의 모상이시고 그분의 성흔을 지니신 당신이여, 저희 주교들과 사제들 곁에 서 주소서. 그들이 저희 신앙의 수호자요 옹호자로서 싸우고, 오류에 맞서며, 당신을 닮은 모습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영원한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1302/03 – 1373)
유럽의 수호성인인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는 사제단과 온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영웅적인 봉헌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당신 종들 가운데 몇몇의 방탕한 삶 때문에 겪으시는 큰 아픔을 거듭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비르지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딸아.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 사제들에게 맡겼고, 그들에게 다섯 가지 선물을 남겼다. 첫째, 나의 믿음. 둘째, 지옥과 천국의 두 열쇠. 셋째, 하느님의 원수를 천사로 만드는 힘. 넷째, 나의 지극히 거룩한 몸을 축성하는 권능, 이는 어떤 천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섯째, 나의 가장 거룩한 몸을 그들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권. 그런데 지금 그들은 내가 나사로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렸다는 것을 부인했던 자들처럼 나를 대한다. […] 오늘날 사제들도 이와 같이 행동한다. 그들이 나의 말씀을 말하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선포하지 않으며, 세상을 향한 사랑을 가르치고 음란을 설교하며, 자기가 짊어진 죄의 빚을 하찮게 여길 때 그러하다.
영원하신 대사제께서 한 성녀를 통하여 사제들에게 전하신 이 탄식은, 성직자와 백성에게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사제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들을 얼마나 선택하셨는지는, 비르지타에게 주신 다음 말씀이 보여 줍니다. 나는 모든 천사와 성인들보다 사제들을 택하였고, 나의 몸을 현존하게 하고 만질 권능을 오직 그들에게만 주었다. […] 나는 사제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오직 그들에게만 그런 영예를 베풀고 싶었고, 그들이 일곱 계단을 거쳐 나에게 올라오게 하였다. 그들은 양처럼 인내하고, 가장 좋은 기초 위의 성벽처럼 굳건하며, 전사처럼 용감하고,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 처녀들처럼 정숙하고, 천사들처럼 깨끗하며, 신랑의 방을 갈망하는 신부처럼 사랑으로 타올라야 한다.
또 비르지타가 천주의 성모님에게서 받은 계시에서는, 교황이 성직자의 정결을 살피도록 권고받습니다. 교황은 각 주교에게, 자기 사제들의 삶을 살피라고 명하여야 한다. 자기 삶을 고치려 하지 않고 금욕 안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의 봉록을 완전히 거두어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의 몸이 창녀의 손에 닿는 것보다 그런 곳에서 미사가 전혀 드려지지 않는 편을 하느님께서 더 바라시기 때문이다.10
10 Gottes Nordlicht, Ferdinand Holböck 저, 1983, 293-295, 298쪽, Imprimatur: 잘츠부르크 대교구 사무국, + Jakob Mayr, 보좌 주교 겸 총대리.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1347 – 1380)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교회 박사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교회를 향한 아주 특별한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동시대인인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영적 무기로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위하여 쉬지 않고 싸웠습니다. 어느 날 환시 중에 「신비로운 교회의 배」가 그녀의 어깨 위에 얹히자, 그녀는 그 무게에 쓰러집니다. 죽기 얼마 전 그녀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영원하신 하느님, 거룩한 교회의 신비체를 위하여 제 생명의 봉헌을 받아 주소서. 제가 드릴 것은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것밖에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러니 제 마음을 받아 주시고, 이 신부의 얼굴 위에서 그것을 짜내 주소서.11
11 성녀 가타리나는 1377년과 1378년에 여러 시기에 걸쳐 한 권의 책을 구술하였는데, 보통 「신적 섭리의 대화」 또는 「신적 가르침의 대화」라고 제목이 붙습니다. 그 책에서 그녀의 영혼은 주님과 황홀한 대화를 나누며, 교회와 그 자녀들, 온 세상의 복리에 관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영원한 진리가 말씀해 주신 것을 전합니다. 이 책은 예언자적 정신, 사고의 균형, 표현의 명료함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우리 종교의 가장 높은 신비들과 수덕 및 신비신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다룹니다. 그녀는 죄의 길에서 파멸해 가는 세상의 형제들을 깨어 있는 마음과 간절한 기도로 바라보며, 치명적인 무감각에서 그들을 흔들어 깨우려 합니다. 섬세한 심리적 직관으로 그녀는 완전함의 길 위에 빛의 다발을 던지고,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에 이르는 확실한 길을 찾는 인간의 고양을 찬양합니다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도 서한 Amantissima Providentia, 1980년 4월 29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1873 – 1897)
가르멜회 수녀이자 세계 선교의 수호자요 교회 박사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교회가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심장이 사랑으로 불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그때 나는 넘치는 기쁨에 못 이겨 외쳤습니다. 오, 예수님, 나의 사랑이시여, … 마침내 나는 나의 소명을 찾았습니다. 나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 그렇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이 될 것이며, … 그렇게 나의 꿈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 나는 그저 어린아이, 약하고 무력한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나의 약함이 나에게 당신의 사랑에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칠 대담함을 줍니다, 오 예수님! […] 나는 아주 작은 희생 하나도 놓치지 않으렵니다. 눈길 하나, 말 한마디도. 가장 사소한 행동들을 이용하여 사랑으로 행하렵니다. … 오 나의 예수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교회, 나의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순수한 사랑의 가장 작은 움직임조차, 다른 모든 업적을 합한 것보다 교회에 더 유익하다는 것을.
사제들을 위한 기도
오 예수님, 영원하신 대사제님, 아무도 그들을 해칠 수 없는 당신 지극히 거룩한 성심의 보호 안에서 당신의 사제들을 지켜 주소서.
매일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몸에 닿는 그들의 기름 부음받은 손을 더럽혀짐 없이 지켜 주소서.
당신의 지극히 귀한 피로 붉어진 그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지켜 주소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의 높은 표징으로 봉인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고 세속을 떠난 채로 지켜 주소서.
당신을 향한 사랑과 충실 안에서 자라게 하시고, 세상의 전염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소서.
빵과 포도주를 변화시키는 힘과 함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도 그들에게 주소서.
그들의 일을 풍성한 열매로 축복하시고, 언젠가 영원한 생명의 관을 그들에게 주소서. 아멘.12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12 데레사가 기도와 봉헌의 바탕으로 삼은 것은 사제직에 대한 큰 존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제들의 약점을 알아차렸지만, 곧바로 비판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에게 기도하고 봉헌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원 준비 기간에 치른 시험 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영혼들을 구하고, 특히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러 왔습니다.」 (출처: Thérèse von Lisieux, Selbstbiographie, 1988)
복녀 디나 벨랑제 (1897 – 1929)
복녀 디나는 캐나다 실레리의 예수와 마리아 수녀회 수녀로서, 사제들과 봉헌된 이들의 성화를 위한 속죄의 삶이 주된 사명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녀에게 봉헌된 영혼들을 향한 당신의 큰 사랑과, 그들의 불충실로 인한 깊은 아픔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나의 사제들, 나의 사제들, 아! 나는 그들을 그토록 사랑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나를 그토록 적게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구나! … 내 마음이 고뇌 중에 그들을 위하여 피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그들이 성화은총을 잃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와 깊이 하나 되는 삶을 충분히 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을 부른다.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라고, 나의 또 다른 나 자신이 되라고. 이것이 그들의 성소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나의 위로, 나의 자랑, 나의 영광이다. 그러나 아! 몇몇은 나를 슬프게 한다. … 나의 작은 신부여, 너는 오늘 하루를 나의 가장 복된 어머니를 통하여 나의 사제들을 위하여 나에게 바치겠느냐? 매주 토요일마다 그렇게 나에게 바치겠느냐? 그것은 곧 나의 지고하신 어머니를 통하여 나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너 자신을 버리고, 나의 사제들을 위하여 너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뜻이냐? […]
사회의 모든 종교 생활은 나의 사제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이 모두 참으로 거룩하다면, 교회 안에서든 길거리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그들의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생각을 나에게로 향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영혼들을 나에게로 이끌 것이며, 그들을 만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기 걸어가는 이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다! […]
영혼이 나에게 온전히 내맡겨질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위로받는지 네가 안다면! 그러나 그런 영혼은 얼마나 적은지! 봉헌된 영혼들 가운데서도 나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이들은 드물다! 내 사도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곧 내가 성체 안에서 나 자신을 주었고 사제로 세운 이들도 봉헌된 영혼들이었으나, 나의 고뇌 중에 잠들어 버렸다! 내 교회가 박해를 받고 고통받는 동안에도 여전히 잠들어 있는 봉헌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디나는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습니다. 우리가 신성한 성체 안에 지니고 있는 보물을 이해한다면, 성당들은 밤낮으로, 감실에 갇혀 계신 신적 포로를 사랑하여 불타는 흠숭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내 마음은 영혼들을 위한 은총으로 넘쳐 흐른다. 그들을 나의 성체의 마음으로 이끌어라! 예수님께서 복녀 디나에게
디나에게는 주님께서 하늘의 복됨과 십자가의 말할 수 없는 가치에 관한 깊은 비밀들도 계시해 주셨습니다.
디나는 하늘의 복됨의 가장 작은 정도조차도 땅 위의 모든 상상할 수 있는 기쁨보다 한없이 더 무겁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의 뜻과의 일치의, 순명의, 또는 포기의 가장 작은 행위도 우리에게 그런 복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께서는 당신 풍요의 심연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지만, 하느님의 거룩한 활동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얼마나 적은지요.
우리는 인간 영혼을 향한 무한하신 선하심의 헤아릴 수 없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땅에서의 가장 긴 생명도 실상은 짧은 한순간일 뿐이다. 우리 지상 생명인 이 순간을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분별을 잃은 것인가. 마지막 시간에는 진리를 가리던 장막이 찢어질 때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있을 것인가! […]
나는 모든 영혼, 특히 선택된 영혼들에게 십자가의 가치를 알아듣게 해 주고 싶다.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금광이다. 고통은 무한하신 분의 마음에서 사랑이 쏘아 올리는 불타는 화살로, 인간의 마음을 태워 신성 안에 잠기게 하려는 것이다. […]
아니다, 이처럼 부드럽고 선하며, 흠숭받으실 신랑의 마음은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거룩한 재산으로 택하셨다. 그분은 열정으로 그것을 끌어안으셨고, 어리석을 만큼 그것을 사랑하셨다. 그것도 우리를 위하여! […] 상처 입고 못 박힌 영혼이 사랑으로 채찍과 창과 귀한 못에 입 맞출 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 오, 진리의 영이시여, 예수님의 공로로 청하오니, 영혼들에게 빛을 주시고, 참된 재산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쳐 주소서. 그리고 시련과 굴욕의 시간에 무한하신 선하심을 알아보게 하소서.13
오 예수님, 영원하신 대사제님,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당신이시여, 복되신 어머니의 거룩한 손을 통하여 저의 고통을 자비로이 받아 주소서. 당신의 십자가와 함께, 저의 것을 사랑으로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당신 사제들의 사도직에 결실을 맺게 하시어, 빛과 사랑과 평화의 당신 나라가 우리에게 오도록 하소서. 아멘.14
13 Die Selige aus Kanada, Engelbert Recktenwald 저, 1996.
14 Imprimatur: Frib. Helv., 1960년 9월 15일.
콘솔라타 베트로네 수녀 (1903 – 1946)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종 콘솔라타 수녀, 클라라 카푸친 수녀회의 수녀에게 맡기신 사명은, 그녀가 영혼들을 부르는 「가장 작은 사랑의 길」을 통하여 세상의 종교적 쇄신과 영혼들의 구원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듯, 이 영적 길은 세 가지 요점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끊임없는 사랑의 행위 – 마음의 기도, 곧 내적 행위.
- 모든 이에게 보내는 미소 어린 「예」: 모든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뵙고, 모든 이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
-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땅 위에서의 예수님의 생애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씨름이었습니다. 이 씨름하는 그리움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콘솔라타 수녀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영혼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 있으랴? […] 「예수님, 마리아님, 사랑합니다. 영혼들을 구하소서!」는 모든 이를 포함한다. 연옥의 영혼들도 투쟁 교회의 영혼들도, 죄 없는 이도 죄 있는 이도, 죽어 가는 이들도 불경한 이들도, 모든 영혼을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자신의 성소에 불충실해진 봉헌된 이들을 콘솔라타 수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녀에게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콘솔라타야, 너에게도 교회 안에 네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할 양 떼가 있다. 너의 형제자매들이다. 자, 너도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가 될 것이다.15
마리아님, 사제들의 선하신 어머니시여, 당신의 특별한 보호와 감싸 주심 아래 모든 사제를 두시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으로 자신의 높은 성소에 불충실해져 길을 잃은 가엾은 사제들도 선한 목자에게로 되돌려 주소서. 아멘.16
이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콘솔라타 수녀는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늘 마음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예수님, 마리아님, 사랑합니다. 영혼들을 구하소서!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한 봉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가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보아라, 모두 하찮은 것들이다. 그러나 네가 큰 사랑으로 나에게 바치기에,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들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 모든 하찮은 것을 나는 우리의 불행한 형제자매들을 위한 회심의 은총으로 쏟아 내리리라.
수도원에는 종종 아주 구체적이고 무거운 사례들이 맡겨졌고, 콘솔라타는 해당하는 고통을 대신하여 떠맡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때때로 오랜 시간 메마름, 버림받음, 무의미함, 외로움, 의심과 사제들의 죄스러운 상태를 겪었습니다. 한번은 이 씨름 속에서 자신의 영적 지도 신부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이 드는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콘솔라타야, 너는 모든 형제자매를 찾아 나서서 나에게 데려올 것이다. 내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린 피를 보아서, 나는 그들을 용서하리라.17
세상의 어떤 형제도, 그가 죄를 지을 수 있는 만큼 모두 지었다 하더라도, 네 눈이 그를 바라보았는데 네 자비 없이 떠나야 할 일은 없어야 한다. 그가 자비를 구하면 네가 자비를 베풀고, 그가 자비를 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에게 자비를 원하는지 물어보아라. 그가 그 뒤에도 너의 눈앞에서 천 번을 더 죄를 짓는다 해도, 그를 나보다 더 사랑하여라. 그렇게 그를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서다. 성 프란치스코
15 유다는 안타깝게도 혼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긴 행렬의 첫 번째였을 뿐입니다. 이 불행한 이들은 모두 예수 성심을 둘러싼 가시들이며, 교회의 가장 쓰라린 눈물의 원인입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도와 봉헌을 통하여 사제들과 봉헌된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추문들을 한탄하며 길 잃은 양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는 많지만, 이 불행한 이들을 선한 목자에게로 되돌리는 일을 돕는 이는 적습니다. 잊지 맙시다. 이 뜻을 위한 짧은 화살기도 하나, 작은 봉헌 하나가 진주이며, 우리 서로의 사랑과 책임의 표징이라는 것을.
16 Imprimatur: 레겐스부르크, 1973년 2월 1일.
17 참조: Schwester Consolata Betrone, P. Lorenzo Sales 저, 1961, Imprimatur: Friburgi Helv., 1961년 9월 15일.
거룩한 미사 – 우리 삶의 태양
세상의 모든 보화 가운데 거룩한 미사 제사보다 더 귀한 것은 없으며, 세상의 모든 불행 가운데 이 지극히 거룩한 제사를 모르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때 우리는 신비체의 지체로서 말하자면 십자가 발치에 서 있으며, 우리의 영원하신 대사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아버지께 찬미, 감사, 속죄, 청원의 완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미사는 온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이며, 가장 높은 예배, 곧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제사의 신비로운 피 흘림 없는 현재화입니다.
주 안에서 나는 또한 나의 모든 형제 사제들,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사제들에게 청합니다. […] 그들은 미사를 드리고자 할 때마다 스스로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경외심과 거룩하고 순수한 지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참된 제사를 바쳐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예수님의 순명하는 봉헌 안에서 아버지께 모든 영광과 영예가 드려집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줍니다. 이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가장 깊은 속성, 곧 헤아릴 수 없는 자비가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온 존재, 우리의 인간적 연약함, 우리의 걱정과 곤궁,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책을 우리는 거룩한 미사의 성변화 사건 안에 내려놓습니다. 봉헌된 그리스도의 몸과 쏟으신 피 안에서 우리는 우리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치유와 속죄를 찾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미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지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한량없는 보물, 지혜를 얻은 이들은 그 가르침이 주는 선물들의 추천으로 하느님의 벗이 된다. (지혜 7,14)
하루의 어떤 시간도 거룩한 미사에 함께하는 시간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은 참으로 황금의 시간입니다. 거룩한 미사에 함께하면서 우리가 짊어지는 희생들은 황금으로 바뀝니다. 태양이 모든 행성을 능가하듯, 거룩한 미사에 경건하게 함께하는 것은 다른 모든 신심 행위를 능가합니다.
성체성사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선행을 하나의 좋은 영성체와 비교해 보십시오. 그것은 산 옆의 먼지 한 알과 같습니다. 아르스의 성 본당 신부
미사가 거행되는 순간, 하늘의 천사들이 연옥의 감옥으로 달려가 그 문을 엽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비오 신부가 한번은 거룩한 미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고통받고 사랑하는 것.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해가 없이도 세상이 버틸 수는 있어도, 거룩한 미사 없이는 버틸 수 없다.
오 예수님, 당신의 죽으심과 거룩한 피로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임종하는 이들을 구하시고, 연옥의 연령들을 구해 주시며,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가정들을 거룩하게 하소서.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이 울려 퍼집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사제의 손을 통하여 골고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서 당신 자신의 살과 피로 여러분을 먹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초대를 따르는 이는 얼마나 적은지요.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 이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비유를 생생하고 실감 나게 바라보려 합니다.
혼인 잔치에 오십시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분은 당신의 신부인 거룩한 교회를 혼인 잔치에 부르시려고, 그리고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비유는 초대받은 이들을 네 무리로 나눕니다:
첫째 무리는 무관심한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번 강조된 간곡함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로서, 오직 지상의 것과 물질만이 그들에게 현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관심 밖입니다. […] 그것은 증권 투기, 직업적 출세, 사회적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초대장은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거나 휴지통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느님 앞에서는 무관심이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는 밖에 서 있는 사람이며, 그에 따라 밖에 머무를 것입니다. 주님의 최종 판결은 이렇게 선포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둘째 무리는 반대하는 이들입니다. 비유에서 그들은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그들은 통치하는 임금 편에도, 왕위 계승자 편에도 서지 않습니다. […] 그들은 분명히 반대 진영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문제에서 그들은 호전적인 무신론자들이며, 그리스도교를 증오하는 자들입니다. 종교는 그들에게 무관심한 일이 아니라, 민중의 아편이며, 인류가 올라서는 데 걸림돌이고, 참된 인간성의 적이며, 미신적인 중세의 방해가 되는 잔재로서 이제 최종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과 글로 싸우고, 공동 행동을 위하여 뭉치며, 저항을 조직합니다. 비유에서 임금의 응답은 지체되지 않습니다. 그의 군대는 적대 세력의 본거지를 포위하여 땅과 같이 평평하게 만들고, 적을 죽입니다. 이것은 세상 끝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큰 결산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셋째 무리는 경외심이 없는 이들입니다. 비유는 그 대표로 한 사람을 그립니다. 길에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그 사람은, 현관에서 예복을 권하였는데도 자기 누더기로 충분히 좋다고 확신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초대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옮겨 보면, 하느님께 무엇이 걸려 있는지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 종교적인 삶은 그들에게 때때로, 자유로이라기보다는 강요에 의하여 표현되는 어떤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주일 미사에 가는데, 이는 점심에 식당에 가고 저녁에 연주회에 가고 평일에 사무실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예배의 초대에 응하면 기뻐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내면 깊이 파악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주인과 종 사이의 차이가 그들에게는 한 번도 참으로 살아 있게 되지 않았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은 상응하는 내적 태도를 갖추려고 전혀 애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주님의 은총 안에 사는지 죄 안에 사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습니다. […] 이 결과는 비유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빛나는 잔칫방에서 어둠 속으로 쫓겨나는 것이며, 선택에서 버림받음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에 외적으로 속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쫓겨남으로 끝납니다.
한 가지 은총의 가치는 온 우주의 가치보다 크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넷째 무리는 참된 혼인 잔치의 손님들입니다. 그들의 출신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떠돌이, 부랑자, 평범한 민중, 울타리와 담장 곁의 거지들. 초대는 그들 삶의 가장 큰 놀라움이었습니다. 기쁘게 그들은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경외의 떨림과 함께 그들은 궁전에 들어섰고, 선물로 받은 예복을 어린아이 같은 기쁨으로 입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혼인 잔치에서 하늘에 있는 것처럼 지냅니다. 오직 한 가지를 두려워합니다. 다시 밖으로, 오물과 비참 속으로, 밖의 추위와 어둠 속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빛나는 눈과 감사하는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은총과 소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죄인이었으나 은총의 세계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모든 것이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알고, 소명을 거저 주어진 은총으로 귀하게 여길 줄 알며, 자기 약함과 죄스러움의 쓰라린 체험을 깊이 지닌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축제의 기쁨의 광채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강생으로 시작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한 축제의 높이에 이르는 혼인 잔치이며, 다시는 꺼지지 않는 빛과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찬성이냐 반대냐, 긍정이냐 부정이냐 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 문제는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깊은 것, 곧 영원한 존재냐 비존재냐입니다.18
하늘의 아버지, 제가 허비한 모든 은총을 보상하기 위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무한한 공로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아멘.
18 Richard Gutzwiller, Die Gleichnisse des Herrn, 2017, Imprimatur: 쿠어 교구 사무국, 1960년 3월 2일.
어머니의 눈물
울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천주의 성모님께서 1846년 9월 19일 라 살레트에서 두 목동 아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러 여기 왔다 … 내 백성이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아들의 팔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팔은 너무도 무겁고 짓누르는 것이어서, 나는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너희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너희는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 엿새 동안 너희에게 일하라고 주었다. 이레째 날은 나를 위하여 남겨 두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조차 나에게 허락하려 하지 않는구나.19 그것이 내 아들의 팔을 그토록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 곡식이 썩는다면, 그것은 오직 너희 때문이다 … 그들이 회개하면, 돌과 바위가 곡식더미로 바뀔 것이고, 밭은 감자로 가득할 것이다 …
아, 얘들아, 너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쳐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아침저녁으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라도 한 번씩 바치거라. 시간이 더 있다면 더 기도하거라! 여름에는 몇몇 나이 든 여인만 미사에 간다. 다른 이들은 여름 내내 주일에도 일한다. 겨울에 할 일이 없으면, 종교를 가지고 웃음거리로 삼으려고만 미사에 간다 …
발현 내내 성모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20
죄인들의 화해자이신 라 살레트의 성모님, 당신께 피신하는 저희를 위하여 쉬지 않고 전구해 주소서!
19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공로로 얻으신 모든 은총은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날들도 마리아의 손을 거쳐 갑니다. (참조: 레오 13세, 회칙 Octobri Mensae) 그래서 라 살레트에서 마리아께서는 「엿새 동안 너희에게 일하라고 주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20 1851년 9월 19일, 라 살레트의 메시지는 그르노블의 주교 필리베르 드 브뤼야르에 의하여 교회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전략이 오늘날의 쇄신 계획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하느님은 천주의 성모님을 통하여, 교회의 도덕 교리의 완화가 아니라 참회와 회심을 요구하십니다. 에큐메니즘을 위하여 마리아 공경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티 없으신 성심에 대한 공경을 요구하십니다. 비오 신부에게 주님께서는 독신 제도의 폐지나 예배를 생생하게 만든다는 전례 실험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에게 보여지는 무관심과 불경을 한탄하십니다. 복녀 디나 벨랑제에게 주님께서는 사제들에게 더 큰 세상 개방성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분과 더 깊이 일치하는 삶을 요구하시며, 수도회와 공동체에는 규율의 이완이 아니라 성 규칙에 대한 더 큰 충실을 요구하십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보내신 메시지에서 주님께서는 죄의식의 약화를 제안하지 않으시고, 자주 거룩한 고해성사 안에서 당신의 자비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날 진보로 찬양받는 것은 실제로는 신앙과 도덕 교리의 훼손이며, 이 훼손은 예수님과 마리아님의 성심을 꿰뚫습니다. (참조: Engelbert Recktenwald, Harter Geist und weiches Herz, Imprimatur: P. Josef Bisig, 총장, FFSP, 오펜바흐, 1996년 10월 21일)
가톨릭 신앙으로 이끄는 조용한 안내자
말씀의 선교수도회(슈타일러 선교회) 소속 괴치 신부와 게르바시우스 형제는 중국에서 이성적인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게르바시우스 형제는 괴치 신부를 가오타이에서 중환자에게 동행합니다. 사흘 동안 말을 타고 이백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간 끝에 목적지에 닿았지만, 환자인 여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침통한 선교사들은 돌아가는 길에 오릅니다. 산길을 타고 가는 여정의 대략 절반쯤에서 그들은 한 소년을 만나는데, 소년은 자기 어머니에게 같이 가 달라고 청합니다. 소년은 그들을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로 이끕니다. 진흙 오두막에서 한 임종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두 선교사에게 느닷없이 기이한 질문을 던집니다.
「낯선 이여, 진실로 대답해 주겠소?」
「물론입니다.」
「세 모습으로 계시는 하느님이 계시오? 저세상에는 선한 이들을 위한 기쁨의 자리와 악한 이들을 위한 두려움의 자리가 있소?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에게 기쁨의 자리를 열어 주셨다는 것이 사실이오? 외국인이여, 이 모든 것이 참이오?」
신부는 놀라워하며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임종하는 여인은 이 신앙의 진리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에게는 물이 있구려」, 여인이 말을 이어 갑니다. 「나를 씻어 주시오, 내가 기쁨의 자리에 가도록!」
괴치 신부가 세례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짧은 대화 뒤에 선교사는 환자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기쁨에 찬 어머니는 새로운 소원을 말합니다. 「당신에게는 빵이 있구려. 보통의 빵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오. 그것도 나에게 주시오.」
임종자는 신부가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괴치 신부는 그녀에게 영성체를 하게 하고, 병자성사를 베풉니다.
그런 다음 그는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이 질문을 하였으니, 이제 내가 몇 가지를 묻겠습니다. 당신은 신앙의 진리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가톨릭 또는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을 알지 못하오, 외국인이여!」
「그 모든 것을 책에서 읽었습니까?」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르오. 내 말로 된 그리스도교 문헌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오.」
「그러면 대체 어떻게 신앙 지식을 얻었습니까?」
「나는 그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소. 십 년 전부터 나는 이 신앙을 따라 살고 있소. 아이들도 가르쳤소. 그 아이들을 모두 ‘씻어’ 줄 수 있소(세례를 뜻함).」
「우리가 오늘 지나갈 것을 알았습니까?」
「그렇소.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나에게 말하였소. 내 아들을 길로 보내 두 외국인을 불러오라고. 그들이 나를 좋은 저세상으로 가도록 ‘씻어’ 줄 것이라고.」
선교사들은 깊이 감동합니다. 죽음을 앞둔 이의 존재는 너무도 단순해서 의심의 여지가 전혀 남지 않습니다. 작별의 선물로 그들은 임종하는 이들의 수호자인 성 요셉의 작은 그림을 줍니다. 그러자 환자는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분을 알고 있소. 그분은 나를 찾아오셨소. 벌써 여러 번 찾아오셔서, 내 아들을 길로 보내 당신들을 부르라고 하셨소.」
그분이 꿈에서 그녀에게 나타나셨는지 실제로 그녀에게 오셨는지, 그녀는 알지 못하며 그것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을 통해 그녀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여인은 바로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21
자애로우신 성 요셉이시여, 성교회의 강력한 보호자시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겪는 큰 고난과 수많은 영혼의 끔찍한 곤궁을 굽어보소서. 오, 예수님과 마리아님,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그들을 도우러 오소서. 불경한 자들의 계획을 흩으시고, 신자들의 마음을 성령의 열기로 불타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자유롭고 솔직하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싸우고 승리하게 하소서. 아멘.22
21 Ludwig Lenzen의 보고, 「Weite Welt」, 1호, 1976년 1월.
22 Imprimatur: 레겐스부르크, 1977년 3월 13일.
교회의 그물 속 물고기들
많은 사람이 전적으로 이승을 지향하고 신앙을 잃은 우리 사회의 영향에 쉽게 휘둘리며, 대개 죄의 법에 묶여 (참조: 로마 7,23) 교회의 성사적 생명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겉보기로 따르는 「자유」23, 곧 그 이름으로 특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들이 내팽개쳐지는 자유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음 안에는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집 센 아이들처럼 하느님의 계명과 그분의 교회에서 물러날 때, 결국 실패한 삶의 혼돈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 불의한 세상이여! 너는 나를 땅 위에서 쫓아내고 사회에서 추방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한다. […] 너는 내 교회를 파괴하고 그 종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꾸민다. […] 그러나 나는 내 사랑으로 너를 부끄럽게 하리라. […]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 말 하나에만도 견줄 수 없는 영원한 기적이 담겨 있다. […] 나의 뜻에는 모든 기쁨의 실체와 모든 행복의 샘이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에게
23 이 「자유」가 결국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보여 줍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1-36)
하느님, 모든 기쁨의 유일한 샘이신 분을 점점 더 「잊어버리고」 그분의 가장 거룩한 뜻에서 멀어질 때, 우리의 양심은 차츰 어두워지고 신앙은 사라집니다. 신앙과 죄는 오래도록 좋은 이웃으로 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사랑하여 그것을 떠나려 하지 않으면, 신앙은 물러서야 합니다.
이 진리를 염두에 두고 성 바오로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믿음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파선당하였습니다. (1티모 1,19)
사람들은 더 이상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을 실천하지 않고, 종교와 교회에 대해 거침없이 욕하며,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들을 의심하다가, 결국 하룻밤 사이에 개신교 신자가 되거나 교회를 완전히 떠나 버립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선한 이들이 교회를 떠날 수 있다고 아무도 믿지 말라. 폭풍은 겨와 짚을 날려 버리지, 밀은 날려 버리지 않는다.
한 청년이 철학자 파스칼 앞에서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자랑하였을 때, 파스칼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죄를 네게서 던져 버려라. 그러면 내일 너는 다시 신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그 도덕적 요구를 더 이상 듣고자 하지 않더라도, 모든 목자와 신자는 굳건하고 충실하게 참된 가톨릭 신앙에 서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특히 주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사랑을 굳게 지키는 사제들은 실로 순교의 길을 걸어가지만,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그들의 품위를 지키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맡기신 많은 영혼에게 축복이 됩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처럼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위해 싸우고, 그로 인해 「헤로디아」, 곧 「세상」의 증오를 불러일으킵니다. 스테파노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하여 증언하고, 그 결과 가장 격렬한 싸움에 휘말립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 (사도 7,54) 또한 나치에게 살해된 복자 순교 사제 오토 노이에루러가 그러하였듯이(그는 이혼하고 교회에서 탈퇴한 나치 장교와 한 젊은 여성의 혼인에 명백히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살해되었습니다), 충실한 사제들도 육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영적·정신적으로 거룩한 복음을 위하여 박해받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으며, 그것들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그분의 사랑하는 신부이며, 그분은 교회를 위하여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찔린 심장에서 성사들의 혼인의 포도주가 흘러나오는데,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부인하면 우리는 스스로 현세와 영원을 위한 그 열매를 빼앗습니다.
바로 이 신앙과 도덕 가치의 중대한 상실, 곧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부분 무너져 내린 그 가치들의 상실은, 교회의 신비체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비극적인 성 학대 스캔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24
오늘 나는 이단자들(참된 신앙을 잃은 이들)과 배교자들(교회를 떠난 이들)의 영혼들을 나에게로 데려와, 나의 자비의 바다에 잠기게 하여라. 쓰라린 고통 속에서 그들은 나의 몸과 나의 마음, 곧 나의 교회를 찢었다. 그들이 교회의 일치로 돌아오면, 나의 상처들이 아물고, 그로써 나의 고통이 가라앉는다. 예수님께서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24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한 고수를 위하여 죽어 가는 동안, 서구에서는 교회의 남성들이 복음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려 애씁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느님의 자비를 이용하여 진리와 정의를 질식시키기까지 합니다. […] 참된 스캔들은 실은 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자비와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선과 악에 관한 불분명함입니다. […] 봉헌된 남성들이 복음 메시지의 급진성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잠재우려 한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에 대한 실제적인 위반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에는 하느님에 대한 대립과 반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조직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 (로베르 사라 추기경, Gott oder Nichts, 2015)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격려의 말씀
깊이 있는 종합적 시선으로,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이 발표한 편지에서 교회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분명하고 격려가 되는 자극을 줍니다. 그 출발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명과 사랑에만 방향을 둘 수 있습니다. 이 편지의 작은 발췌를 여기에 인용하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의 도덕적 동요로부터 생겨나는 첫째 과제는, 우리 자신이 다시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우리 삶의 토대로 알아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그분의 마음에 너무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분께서는 그와 하나가 되셨고, 아주 실제적으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 물론 우리는 신학에서 학식 있는 말과 사상으로 이것을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하여, 신앙에 의해 새로워지고 다스림을 받기보다는 우리가 신앙의 주인이 되어 버릴 위험이 생깁니다.
이 점을 중심 주제인 거룩한 성찬례의 거행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체를 대하는 방식은 걱정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 곧 그분의 인격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현존인 이 성사를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회 존재의 중심으로 다시 옮겨 놓는 데 올바르게 힘썼습니다. 그 일은 부분적으로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이에 대하여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널리 지배적인 것은 다른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존 앞에서 새로운 경외심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의 위대함을 무너뜨리는 그분과의 교제 방식이 지배합니다. 주일 성찬례 참여가 줄어드는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실재적 현존 안에 있는 선물의 위대함을 얼마나 적게 가늠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체는, 가족 잔치나 혼인, 장례처럼 친척 관계로 초대된 모든 이에게 예의상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겨질 때, 단순한 의례적 몸짓으로 깎아내려집니다. 여러 곳에서 참석자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성체를 받는 것은, 사람들이 영성체를 이제 의례적인 몸짓으로만 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고안해 낸 다른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쇄신입니다. […]
사제들의 수많은 남용 사건으로 생긴 위기는, 교회를 말 그대로 잘못 만들어진 무엇인가로 여기고, 이제 우리가 철저히 직접 손에 쥐고 새로 빚어야 한다고 몰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교회는 그 어떤 희망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교회를 그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그물 안에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있고, 결국 하느님께서 직접 그것들을 갈라 내셔야 합니다. 그 곁에는 교회를 밭에 비유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뿌리신 좋은 곡식이 자라는 밭인데, 「한 원수」가 몰래 그 위에 뿌린 가라지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밭인 교회의 가라지는 지나치게 눈에 띄고, 그물 안의 나쁜 물고기들도 자기 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밭은 여전히 하느님의 밭이고, 그물은 여전히 하느님의 그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가라지와 나쁜 물고기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씨앗과 좋은 물고기도 있습니다. 이 둘을 똑같이 힘주어 선포하는 것은 잘못된 호교론(변론)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필수적인 봉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 묵시록의 한 중요한 본문을 가리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악마는, 밤낮으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는 고발자로 묘사됩니다. (묵시 12,10) 묵시록은 여기서 욥기 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생각을 다시 취합니다. (욥 1장과 2,10; 42,7-16) 거기서는 악마가 하느님 앞에서 욥의 의로움을 단지 외적인 것이라고 깎아내리려 했다고 전합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분명한 것은, 온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서 본보기로 서 있는 욥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인간의 드라마가 그 온 폭에 걸쳐 그려집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맞서 있는 것은 악마로서, 온 인류와 온 창조 세계를 헐뜯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만드셨는지. 좋은 창조라고 하지만, 실은 그 전체가 비참과 혐오로 가득하다고. 창조를 헐뜯는 것은 실은 하느님을 헐뜯는 것입니다. […]
오늘날 하느님을 고발하는 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교회 전체를 깎아내리고, 그렇게 하여 우리를 교회에서 떼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더 낫게 만든 교회라는 생각은 사실 악마의 제안이며, 우리가 너무 쉽게 걸려드는 거짓된 논리로 우리를 살아 계신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나쁜 물고기와 가라지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도구입니다. 악마의 거짓말과 반쪽짜리 진리에 온전한 진리를 맞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네, 교회 안에는 죄와 악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또한 오늘날에도 파괴되지 않는 거룩한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겸손하게 믿고,25 고통받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이 있으며, 그들 안에서 참된 하느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세상에 당신의 증인(「martyres」)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듣기 위해 깨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순교자」라는 말은 소송법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악마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위한 첫째이자 참된 증인이시며, 첫 번째 순교자이십니다. 그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이가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순교자들의 교회이며, 그렇기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증인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둘러본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서나, 특히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러나 교회의 높은 자리에서도, 자신의 삶과 고난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게으름입니다. 우리 선포의 크고 본질적인 과제 가운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신앙의 삶의 자리를 만들고, 무엇보다 그것을 찾아내고 인정하는 일이 있습니다. […]26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
25 예수님께서 마르 9,42에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을 경계하실 때, 그분께서 뜻하시는 것은 「단순한 신앙인들이, 영리하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지적 오만 때문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삭제 본문, 같은 곳)
26 kath.net/pl, 2019.
나는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다. 세상아, 어찌하여 나를 모욕하느냐? 나는 모든 시대의 그리움이었다. 나는 모든 길의 길이다. 나를 따라 천 년의 세월이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
카타콤바에서 드리는 거룩한 미사 제사
박해받는 교회
십자가 수녀회의 복녀 즈덴카 셸린고바,27 191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크리바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바친 셀 수 없이 많은 순교자 무리의 한 본보기입니다.28
즈덴카 수녀는 특별한 영혼의 평정을 지녔고, 그녀의 눈에서는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빛이 비쳤습니다. 그녀 특유의 부드럽고 겸손한 미소가 그녀 삶의 중심 모티프가 되어, 그녀는 일기를 이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미소 지으며 고통의 작은 장미를 꺾어라. 미소 지으며 말하라. 미소 지으며 도와라. 미소 지으며 부당함을 받아들여라 … 미소 지으며 너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감추어라 … 미소 지으며 골고타로 걸어가라. 거기서 너는 모든 악의와 거짓, 인간의 모든 착오를 너보다 훨씬 먼저 알고 계셨던 분을 만날 것이다.
그녀의 삶이 예수님의 희생 안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었는지는 다음 말씀도 보여 줍니다. 어두운 구름 뒤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태양이 빛난다 … 주님의 제대에서 나는 나의 일터의 제대로, 아침 식사로, 그리고 이어서 진료소로 간다. 어디에서나 나는 제대의 희생을 이어 가야 한다.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교회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부터 모든 수도원과 신학교를 해체하였습니다. 1952년 2월 20일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즈덴카 수녀가 일하던 병원에 경보가 울렸습니다. 지난밤, 환자였던, 고문으로 심하게 학대당한 사제 슈테판 코슈티알이 도망쳤던 것입니다. 경찰은 심지어 수녀들이 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던 경당까지 점령하였고, 즈덴카 수녀는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때가 왔다. 이제 나도 가게 되리라. 사제의 도주를 도운 이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이 수녀는 처음에는 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흐레가 지나서야 그녀는 실제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날을 위해 그녀가 준비한 두 번째 도주, 곧 다른 세 사제와 세 신학생의 도주가 발각되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네 달 동안 잔혹한 심문이 이어졌습니다. 즈덴카 수녀는 여러 차례 잔혹하게 고문당했고, 그 뒤 상처투성이가 되어 감방으로 끌려 돌아왔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거의 매를 맞아 죽을 뻔했을 때, 한 동료 수감자에게 속삭였습니다. 용서는 삶에서 가장 큰 것이다.
사법 당국은 즈덴카 수녀가 잔혹한 고문과 다섯 감옥에서 보낸 삼 년 반 때문에 중태에 빠진 것을 보고, 1955년 4월 16일 그 수녀를 가석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순교자로 여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석 달은 즈덴카 수녀가 암 병동에서 보냈습니다. 그녀는 많이 기도했고, 큰 고통 속에서도 깊은 평화를 발산하였습니다.
1955년 7월 31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 환자의 상태가 나빠졌고, 그녀는 삶이 끝나 가고 있음을 느껴 이른 아침에 영성체를 청하였습니다. 즈덴카 수녀는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경당에서 거룩한 미사 제사가 봉헌되는 동안 고요하고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29
27 P. Dr. Bernhard Vošicky OCist (Heiligenkreuz)의 대고모.
28 순교자들은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징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데, 그분께서는 당신 교회에서, 그리고 그분께 충실히 따르기로 결심한 이들에게서 돌아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제 그분의 현존은 박해받는 제자들 안에서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도 9,4-5) (추기경 로베르 사라의 Gott oder Nichts에서)
29 참조: Triumph des Herzens, 78호.
거룩하신 대천사 미카엘이여,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옥좌를 루치펠의 공격으로부터 지키셨습니다. 이제 땅에서도 하느님의 대리자인 교황과 가톨릭교회를 보호하소서. 아멘.
배우의 회심
성 비오 신부(1887 – 1968)가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이룬 참된 회심의 여러 사례 가운데, 특히 배우 카를로 캄파니니의 회심이 두드러집니다. […]
캄파니니가 회심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경건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카를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언젠가 무엇이든 선한 일을 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저 위에서 어머니가 이 불행한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
그가 말하는 「비오 신부의 불꽃」은, 그가 열아홉 살이었을 때 그의 안에서 타올랐습니다. 그는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피에몬테 출신의 극단을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같은 위대한 성인들을 만날 수 있던 때에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위대한 성인들이 더 이상 없다.
그의 대화 상대는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성인들은 아직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비오 신부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의 성흔을 지니고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고통을 봉헌하는 카푸친 수도자입니다. 이 말이 카를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캄파니니가 비오 신부를 만난 것은 몇 해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비오 신부의 기도 모임에서 직접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탈선하였습니다. 주님의 열 계명 가운데 여덟 개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두 개가 나를 거슬렀고, 그래서 나는 그 모두를 물리치고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
1949년 말, 나는 명성의 절정에 이르렀고, 동시에 세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며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참 좋은 처지에 있군요. 그 아름다운 여인들과 비싼 자동차들 사이에서요. … 그 말에 대해서는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삶을 증오하였습니다.
1950년 1월 10일, 나는 차에 올라 비오 신부에게 갔습니다. 고해를 청하고 기다렸습니다. 내 차례가 왔습니다. 입을 열려고 할 때, 비오 신부는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1946년부터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하라. 여러분은 내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동안 나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아라! 내 얼굴을 바라보아라!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나 앞에서 부끄러워하지만, 너는 생각도 없이 그분을 욕되게 하였다. […] 그는 모든 것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온 생애를 바꾸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그는 나에게 사죄경을 주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참으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유혹을 경멸하고, 그것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팔에 안고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며, 그분의 옆구리 상처에 입 맞추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여기 나의 희망이 있고, 여기 나의 행복의 살아 있는 샘이 있습니다. 나의 예수님, 당신을 꼭 붙들고 있겠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실 때까지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성 비오 신부
박해받는 이들의 밤 미사 (게브하르트 푸겔, 1920년경)
거룩한 미사
비오 신부는 카를로가 산 조반니 로톤도에 머무는 동안, 그를 하느님의 은총 안으로 되돌려 놓았을 뿐 아니라 그의 새로운 삶의 첫걸음으로도 이끌었습니다. 비오 신부는 그 토대로 거룩한 성체를 놓았습니다.
캄파니니는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거룩한 미사의 가치도, 거룩한 영성체의 가치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다른 많은 이들처럼 거룩한 미사에 가지 않고도 좋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비오 신부가 제대에서 축성된 성체를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며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이 눈물과 이 피는 무엇인가? 왜 그분은 이토록 고통받는가? 왜 그분은 날마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이토록 고통스러운 증언을 하는가?
배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도 저 십자가를 바라보아라. […] 얼마나 자주 너는 저 가시관에 기대어 그것을 그분의 살 속에 더 깊이 박아 넣었느냐? 얼마나 자주 너도 망치로 저 상처 입은 손과 발을 내리쳤느냐?」
나는 울기 시작하였고,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총고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내 생애에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고통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나는 새로운 메시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 말씀들은 내가 어린 시절 교리 시간에 이미 들었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분의 희생이 거룩한 미사에서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떠올려 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표징을 받아야 했습니다.
떠나기 전 아침, 나는 영성체를 하려고 제대로 나아갔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성체를 내밀자, 나는 마치 그분께서 내 혀 위에 횃불을 올려놓으신 듯, 그것이 혀 위에서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룩한 영성체를 받는 방식에는, 교회가 빵과 포도주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 안에서 자신의 신적 신랑을 감싸는 그 사랑에 찬 경외와 섬세함이 비쳐야 합니다. 잘츠부르크 영원한 흠숭의 카푸친 수녀회 회헌에서
나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감추려고 성당 뒤에 숨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그날 나는, 거룩한 성체라는 선물을 깨닫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날마다 거룩한 미사에 가고 영성체를 하겠다고 예수님께 약속하였습니다.
로마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내가 지나치다고, 광신자가 되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도 일 년에 한 번의 영성체와 주일의 거룩한 미사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약속에 충실하였습니다.30
고통을 사랑하는 것
비오 신부는 캄파니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를 가장 깊이 감동시키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여기는 것은 고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비오 신부는 고해 중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인류가 고통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쁨을 좇지 않고, 오직 고통만을 좇을 것이다.
카를로는 성인의 이 말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인정합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비오 신부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그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신부님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보았고, 그분이 우리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것을 기쁘게 봉헌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나 역시 차츰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고통을 통하여 나도 온 우주의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31
30 수십만 명이 깊은 감동 속에서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비오 신부의 미사에 참석하였고, 그의 눈물과 피 흘리는 성흔을 보았으며, 그 가운데서 골고타 제사가 새로워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드라마의 일부를 느꼈습니다.
31 「Der Padre」 1권, P. Marcellino Iasenza Niro, 2006.
매일의 봉헌
영원하신 아버지, 마리아의 가장 순결한 손을 통하여, 오늘 모든 사제가 제대 위로 들어 올리는 성작 안에 나의 생각, 나의 일, 나의 수고와 고통, 나의 현재, 나의 과거, 나의 미래, 나의 모든 죄, 나의 모든 사랑하는 이들, 세상의 모든 영혼, 가엾은 연령들, 그리고 죽음 그 자체를 넣어 바치나이다.
나의 가슴의 모든 박동, 모든 숨, 모든 발걸음, 모든 소리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나의 이 모든 행위가 당신에 의하여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그만큼 많은 사랑의 행위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지향으로 그리하나이다. 나의 날이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끊임없는 미사, 한결같은 제사,32 영원한 영성체가 되게 하시어, 당신의 신적 정의에 보속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33
32 예수님께서 날마다 미사에서 당신의 온전한 제물을 새롭게 하시듯, 우리도 거룩한 미사 제사에서 우리 신분에 맞는 봉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사와 결합하여 하늘의 아버지께 드립니다. 모든 찬미, 모든 청원, 모든 봉헌은 하느님 마음의 무궁한 풍요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은총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과 같습니다.
33 Imprimatur: 1970년 12월 28일.
신적 별과 신부다운 영혼
구세주 예수님, 그분은 나의 별이시니,
그분만을 위하여 사는 것, 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원하네.
하늘에서만 그분은 나를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아니, 깊은 마음속에서도 언제나 비추시네.
한때 그분은 거룩한 태중의 작은 별이셨으니,
사람으로 숨으셨으나 참으로 하느님, 전능하고 위대하신 분.
영원한 계획에 의해 예로부터 정해져,
하느님의 말씀이 아기가 되실 것이었네.
거룩한 동정녀께서 그분을 낳으셨으니,
그 이름 마리아, 하느님께서 그녀를 택하셨네.
그녀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별에게로 이끄시니,
오, 그분의 어머니,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세상이 놀라움에 잠겨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녀는 하늘의 별을 땅 위에서 보셨으니!
신적 은총 안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걸음으로,
가난과 죄 속의 작은 양들을 비추려고.
저 높은 골고타에서, 나는 믿을 수 없어라,
나의 별이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빛을 잃으시니.
오, 이제 세상은 이토록 어둡고 캄캄하여도,
사흘 뒤 그분은 모든 것을 밝히시네.
이제 그분은 하늘의 장막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시며,
선하심 가득하여 온 세상을 비추신다.
그러나 그분은 여기에도 머무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감실에 숨어 계시며, 거기서 그분은 나를 비추신다.
빨리 성당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되니,
거기서 그분은 사랑으로 머무르시며 아이를 기다리신다.
흠숭하고 놀라워하며 나는 그때 여기 무릎 꿇으니,
그분께서 나에게 물으실 때까지: 「나의 아이야,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오 별이시여, 별이시여, 작은 양들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들어 보라, 그분께서 나에게 대답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고통받으며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러면 나는 그들을 하늘 문으로 이끌리라!」
나는 또 별에게 묻는다. 「말씀해 주소서,
제가 당신께 무엇이옵니까?」
그러자 기쁨에 차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아가야, 어린 소녀야, 나의 마음의 신부여, 너는 이것이 마음에 드느냐?」
이제 그분은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
「오 별이시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니,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누가 나에게 금과 돈, 아니 나라들까지 준다 해도,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하리라. 그것은 참이 아니라고.
별에게 모든 것이, 참으로 모든 것이 오직 속하니,
놀라워하라, 오 기적이여, 이 별이 나의 것이로다.
그분 입김에서 세계들이 생겨나고,
그분께서 놓치실 생각은 하나도 없다.
때로 나에게 두렵고 무거울지라도,
나는 그분을 더욱 신뢰하려 하네.
오직 사랑에서 그분은 나에게 고통을 보내시니,
영원을 위한 그 가치를 그분께서는 아시기 때문이다.
만일 타락해 버린 한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곧 물어보리라. 「아니, 너는 강도들 사이에 떨어졌느냐?
어서 와라, 우리가 별에게로 달려가자, 그분께서는 너도 사랑하시니,
곧 너도 나처럼 행복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생명이 끝나면,
나의 별이 하늘의 집으로 나를 비추리라.
기쁨과 행복으로 내 마음은 터질 듯하고,
마침내 집에 와서, 나는 완전히 황홀하구나.
하늘의 천사들이 크게 노래한다:
「오 보라, 보라, 이제 신부가 온다!」
그분은 사랑으로 가득 차 나를 신적 마음에 껴안으시고,
내 눈에서 모든 눈물과 아픔을 닦아 주신다.
이제 나는 복됨으로 가득한 별 곁에 살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혼인 잔치를 연다.
나를 바라보시고
그분의 작은 마음의 신부로 삼으신 주님께 감사를!
그러나 내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면,
나는 뉘우침과 아픔으로 울기만 하리라.
그러면 그분은 거룩한 피로 붉게 나를 비추시며,
자주빛 불꽃 속에서 나를 깨끗이 씻어 주신다.
나의 영혼이여, 그분은 너에게서도 멀지 않으시니,
사랑으로 기다리시며 너를 그토록 아끼신다!
나의 별은 영원부터 이미 나를 바라보고 계시니,
너는 그분께서 너를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믿느냐? 영원한 흠숭의 카푸친 수녀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 나는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자손이고 빛나는 샛별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 오십시오! …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묵시 22,12-20
복녀 안젤리나 디 마르샤노
성소를 위한 기도
주 예수님, 당신께서 일찍이 첫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듯이, 오늘도 당신의 좋은 초대가 끊임없이 울리게 하소서. 「와서 나를 따라라!」 젊은 남녀들에게 당신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은총을 주소서! 저희 주교들과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힘겨운 사목 활동을 하는 중에 그들을 도와주소서. 저희 신학생들에게,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전적인 봉헌의 이상을 실현하려 애쓰는 모든 이에게 인내를 주소서. 저희 공동체 안에 선교의 정신을 일깨워 주소서. 주님, 당신의 수확을 위하여 일꾼들을 보내 주시고, 사제와 선교사와 수도자가 부족하여 인류가 복음을 충분히 체험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교회의 어머니, 모든 성소의 모범이신 마리아님,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하도록 저희를 부르시는 주님께 「예」라고 응답하도록 저희를 도와주소서. 아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거룩한 미사는 땅 위의 나의 하늘이다!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 19,9